배우 이혜영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행운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그만이 가진 과감함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4년 차 배우이지만 여전히 편함보다는 도전을 선택하는 이혜영을 만났다.
글 남혜연 사진 NEW, 수필름
솔직하고 거침없다. 배우 이혜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간 보여준 개성 있는 연기만큼 정곡을 찔렀고, 새로웠다. 때문에 마주 앉아 인터뷰를 하는 순간이 마치 또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44년 동안 쉼 없이 달려왔기에 작품을 뛰어 넘는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배우 이혜영이 한국 영화계에서 '보석'으로 불리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감함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개봉한 이혜영 주연의 영화 <파과>는 '파격'을 넘어 '배우 이혜영이라 가능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파과>는 구병모 작가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으로, 예순을 훌쩍 넘긴 여자 킬러 조각(이혜영 분)과 미스터리한 남자 킬러 투우(김성철 분)의 대결을 그린 액션물. 원작 소설 팬들의 가상 캐스팅 1순위였던 이혜영은 조각을 완벽히 구현했다.
편함보다 도전을 선택한 44년 차 배우
"어울리지 않는 역할인 것 같아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너무 할머니 같아서요.(웃음) 비현실적이었고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문득 조각의 힘이 궁금해졌어요. 쓸모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역으로 활동하기를 고집하는 조각의 신념이 알고 싶었죠. 어느덧 두려움은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민규동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고 해서 믿어보기로 했어요. 민 감독 영화 중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좋아하는데, 그런 식의 판타지가 녹아들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러면서 편하게 배우를 할지 한번 도전을 해볼지 생각하다 도전을 선택했어요."
그야말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급기야 이혜영은 '한국에 정말 좋은 배우가 많은데, 왜 나를 캐스팅하지?'라는 생각을 하다 "찍으면서 보니까 내가 보톡스를 안 맞아서 그랬나 보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민규동 감독은 이 같은 반응에 "이혜영 선배님은 어릴 적 극장에서 뵈었을 때부터 저에게 신비로운 존재였다. 분명 한국인이지만 너무 한국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고,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며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고, 그 떨림과 에너지가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이 역할을 준비해오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로 <파과>는 운명이었음을 설명했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이후의 결과는 찬란했다. <테이큰>의 리암 니슨, <존 윅>의 키아누 리브스를 잇는 새로운 킬러의 탄생. 바로 '60대 여성 킬러 이혜영'의 도전은 성공적이었고, 영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이어 브뤼셀 판타스틱영화제, 베이징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목숨 바쳐 찍은 영화 <파과>
물론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열흘 후 <파과> 현장에 합류해 몸을 만들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크고 작은 부상이 촬영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몸 바쳐서 하는데 (나는) 늙었지, 다쳐도 회복은 더디지, 이러다 정말 배우 못하는 거 아니야 하는 공포까지 오는데, 만약 영화까지 안 좋다는 평이 나오게 되면 나는 정말 뭐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목숨 걸고 했어요. 붕대며 보호대며 연기 몰입을 방해하는 게 많았고, 뭘 하든 다 병원행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피도 눈물도 없이>를 찍어서인지 원래 깡패 기질이 있는지 편집 덕을 보니 그럴듯하게 나오는 것 같아요.(웃음)"
도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
이혜영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번에는 연극이다. <헤다가블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박정희 연출로 초연 당시 주인공 헤다 가블러로 출연했던 그는 1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티켓 예매가 시작된 뒤 일주일 만에 전 회차가 매진되는 등 큰 관심을 끌었다.
"기회를 받지 못한 분들에 비한다면 저는 대성공을 거뒀어요.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았죠. 초연 당시 '이혜영이라는 배우가 있기에 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거다'는 말을 믿고 이 역할은 내 것인 것처럼 연기했어요. 이번엔 타 극단에서 다른 배우가 연기한다고 해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제 초연 이후에도 여러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토록 무지한데 이게 또 제가 계속 연기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