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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부부갈등 없이
부부 화합하기

은퇴는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의 하나이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돈벌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달콤함을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많이 다르다. 기대했던 배우자와의 행복한 은퇴 생활이 부부간의 갈등으로 산산조각이 나는 일은 그중에서도 특히 괴로운 일의 하나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은퇴 후 부부갈등이 발생하는 이유와 그 해결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장

“오늘은 어디 안 가?” 요즘 한 달 동안 일시적인 실업 상태에 있는 아내가 필자에게 아침마다 하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필자가 제발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아내의 가시 같은 날카로운 심정이 녹아있다. 퇴직 후 10년 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평일에 집에 있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요즘 날마다 들리는 아내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필자의 마음은 생채기로 멍든다. 이론적으로는 익히 알고 이런 생활을 시작했지만,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혀보니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게 쉽지 않다. 이러다가 유행가 가사처럼 도로 남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은퇴 남편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이는 은퇴 후 집에만 있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아내가 자주 몸이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1991년 일본에서 처음 사용된 말로, 이 상황이 심해지면 황혼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은퇴한 남편을 비하하는 말인 ‘삼식이’, ‘젖은 낙엽’ 등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남편으로서는 매우 불쾌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 담겨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골계의 미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세끼를 챙겨 먹는 남편을 뜻하는 ‘삼식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 한끼라도 밖에서 해결하면 된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아내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을 뜻하는 ‘젖은 낙엽’ 신세를 면하려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가정의 권력은 주방에 있다

‘은퇴 아내 증후군’이란 말은 없는데 ‘은퇴 남편 증후군’이란 말은 왜 생겼을까? 일반적인 원인으로는 남편의 은퇴로 인한 경제적 부담감, 남편의 잦은 간섭, 식사 준비에 대한 부담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은퇴 남편 증후군’이란 말을 유심히 관찰하면 무서운 진실에 직면한다. 이 말은 가정의 진정한 주인, 즉 가정의 권력자는 남편이 아니라 아내라는 것을 내포한다. 아내가 장악하고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에 은퇴한 남편이 비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으면 아내는 불편함을 느끼고, 나아가 똬리를 틀고 앉은 남편이 아내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눈치를 주면 아내의 심기는 폭발 직전으로 치닫는다. 이런 일이 길어지면 아내는 결국 ‘은퇴 남편 증후군’이라는 홧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아내의 ‘은퇴 남편 증후군’을 없애고, 은퇴한 남편이 가정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해해야 한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09년에 쓴 칼럼에서 “힘은 부엌에 있다. 문제는 부엌에 머무는 여성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는 남성이다”라고 했다. 즉, 가정의 권력은 바로 주방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시인 정현종은 1995년에 발간한 시집 《세상의 나무들》에서 부엌을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이라고 노래했다. 그는 ‘부엌을 기리는 노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이타(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성단(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 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오.”

주방일을 가족의 즐거운 일상으로

은퇴한 남편이 갑자기 주방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양반과 집사람 또는 안사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오랜 기간 요리와 설거지로 대변되는 주방의 일은 아내의 몫이었고, 남편이 은퇴할 시점에 아내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있다. 이는 아내보다 은퇴한 남편이 부엌일을 더 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포기해버리면 부부 사이에 강력한 한랭전선만 형성될 뿐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요리와 설거지 중 그나마 난도가 낮은 일은 설거지일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남편이 설거지했는데, 아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핀잔을 주면 절대 안 된다.

주방일과 관련한 필자의 경험담이다. 수년 전부터 필자의 집에서는 요리한 사람은 설거지를 면해주고, 나머지가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이 설거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다 보니 귀찮은 설거지가 게임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잠시나마 긴장과 환호, 한탄이 집 안에 울려 퍼지며 생기를 더하게 되었다. 요리도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도전하면 된다. 필자도 한때 레시피를 뒤져가며 이런저런 요리에 도전해봤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맛이 없는 요리임에도 아내는 맛있다며 제일 먼저 뚝딱 해치웠다. 그러다 어느 날 탈이 나고 말았다. 동서양 퓨전요리에 도전했는데, 그동안의 요리 중 최악의 맛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맛있다며다 먹더니 결국 배탈이 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아내는 더는 필자에게 요리를 부탁하지 않는다. 간혹 비빔국수를 요청하기는 하지만….

부부는 따로 또 같이

필자는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막 은퇴한 지인을 만나면 기회 있을때마다 부부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내를 위해서는 물론 남편을 위해서도 부부는 화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은퇴했으니 부부가 같이해야 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집안일을 제외한 나머지에 ‘늘 같이’를 외치는 것은 과욕이다.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밀어주는 ‘따로 또 같이’의 자세로 생활할 때 부부는 화목해지고, 가정은 평안할 것이다. 20년 이상을 같이 산 부부라도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결혼하기 이전에는 각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결혼 이후에도 대부분 시간을 따로 보냈다. 그러다 은퇴 후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해야 하는 일은 서로에게 매우 낯선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부부니까 ‘늘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 ‘따로 또 같이’한다는 마음가짐과 그를 실천하기 위한 매뉴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