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만남

꽃미남보다 꽃배우
정일우

정일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나. 그의 최근작 영화 <고속도로 가족>을 보고 난 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꽃미남 배우’라는 좁디좁은 편견에서 빠져나온 그는 이제 막 배우로서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정유진 사진 9아토엔터테인먼트

13년 만의 영화…
한다고 해놓고 엄청나게 걱정

중국 영화나 특별 출연 등을 제외하고 보면 <고속도로 가족>은 정일우가 무려 13년 만에 출연한 영화다. 영화 아닌 드라마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대단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 <황금무지개>(2013), <야경꾼 일지>(2014)부터 최근작인 <보쌈-운명을 훔치다>(2021)와 <굿잡>(2022)까지. 십여 년간 여러 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안방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고속도로 가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극 중 두 아이의 아빠이자 임신한 아내 지숙(김슬기 분)의 남편인 기우는 무척 특별한 캐릭터다. 고속도로 주차장에서 관광객들에게 2만 원씩 빌려 가족들과 자신의 식비를 충당하는 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러 정서적인 문제에 고통받다 극의 말미에는 결국 극단적인 성격의 변화를 드러내며 관객에게 충격을 안긴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하겠다고 얘기했는데 그러고 나서 일주일 뒤에 감독님을 만날 때까지의 시간이 지옥 같았어요. 이걸 왜 한다고 그랬지? 어떻게 해야 하지? 엄청난 걱정과 고민을 안고 감독님을 뵀죠. 그런데 감독님은 ‘편하게 <거침없이 하이킥> 윤호라고 생각하고 하세요’ 하시더라고요. 기우는 그런 밝은 모습이 있는 친구였으면 좋겠다고요.”

처음에는 자신의 대표 캐릭터와 기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현실에서 도피 중인 천진난만한 아빠 캐릭터와 낭만적인 윤호의 비슷한 면모를 발견하게 됐다.

“감정선이 다이내믹한 캐릭터라 시나리오를 읽고 저도 기우라는 인물을 더 알아가고 싶었어요. 내 감정의 끝은 어딘지, 얼마만큼 치달을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고 싶은 캐릭터였죠. 예고편만 보시면 따뜻하고 밝은 영화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이 캐릭터에는 아픔이 있고, 거기서 큰 반전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

내 연기 본 박해일 선배의 반응?
기분 좋았죠

기우를 이해하기 위해 정일우는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극단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인 만큼 정밀한 이해가 필요했다.

“아픔이 있는 분들은 보통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 혹은 가족들과 같이 있을 때는 괜찮대요. 평소에 굉장히 밝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 많고요. 평범해 보이다가도 무언가와 충돌이 생기거나 과거에 아픈 누군가가 나를 공격한다거나 하면 극단적으로 폭발하는 감정으로 치닫는대요. 그래서 영화 속에서 저는 일부러 ‘하이 텐션’을 유지했어요.”

<고속도로 가족>은 올해 10월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영화제에서 겪은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진짜 정일우 맞아?”라고 되묻는, 어느 관객의 놀란 목소리였다. 13년 만에 특별한 캐릭터로, 관객에게 인정받게 된 마음은 어떨까.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정일우는 “만족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 작품 하길 너무 잘했다고 100% 생각하는데 만족은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백현진 선배님의 연기에 ‘미쳤다’ 싶었거든요. 다른 차원의 연기를 하고 계셨어요. 생활 연기가 너무 완벽하세요.”

겸손하게 얘기했지만, <고속도로 가족> 속 정일우의 연기는 일반 관객뿐 아니라 배우 선배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존경해왔던 선배 박해일의 격려 섞인 말은 그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재벌집 아들 역 아니어도 할 수 있어요

사실상 노숙자 역할이었기에, 이번 영화에서 정일우는 역대 출연작 중 가장 적은 의상을 입었다. 그야말로 단벌 신사였다.

“옷은 하나밖에 없었죠. 극 중 신고 나온 운동화는 실제로 제가 고등학교 때 산 등산화였어요. 20년이나 돼 낡아버려서 밑창이 너덜너덜해졌어요. 그걸 또 의상팀에서 더 해지게 만들어주셨어요. 옷은 감독님이 동묘에 가서 사 오신 거였어요.”

영화 속에서 그는 ‘청춘 스타’로서는 파격적인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다든가, 얼굴에 진흙을 잔뜩 바른다든가 하는 장면이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썼어요. 그저 ‘도대체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컨트롤하지 않는 감정의 끝은 어디인가’가 궁금하고 그것을 계속 가져가려고 문을 두드렸던 것 같아요. 대체복무를 할 때 요양병원에서 근무했어요. 거기 계신 환자 90% 이상이 치매를 앓고 계셨는데 그분들을 돌보며 봐왔던 것들이 있어서 침을 흘린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낯설지는 않았어요. 제게는 그렇게 기이한 행동은 아니었죠.”

이 영화를 찍고 나서 정일우는 누구보다 행복함을 느낀다고 했다. 독립영화라 상업영화만큼의 흥행이나 파급력을 기대할 수 없지만, 그저 자신의 가능성을 또 한 번 보여줄 수 있었다는 데 만족감을 크게 느낀다. '스타'이기보다 ‘배우’이길 바라는 진심이 전해졌다.

“이 영화를 하면서 제 마음은 딱 그거였어요. 정일우가 드라마에서 재벌집 아들 같은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도 할 수 있는 배우라는 걸 보여드리는 거요. 그걸 보여드린 것 같아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