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만남

세상 가장 ‘쿨’한
그랜마(Grandma)
윤여정

우아한 은발을 한 윤여정이 미국에서 붙은 자신의 별명이 ‘새비지 그랜마(Savage Grandma)’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새비지의 본래 의미는 ‘사납다’지만, 요즘에는 ‘멋지다’라는 의미의 신조어로 쓰인다.) 콧대 높은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매력적인 한국인 할머니,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역사를 쓴 배우 윤여정이 신작 <파친코>로 돌아왔다.

정유진 사진 티빙

아카데미 수상 후 달라진 것?
하나도 없어!

윤여정은 지난해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의 수상이자 한국 영화계의 큰 경사였다. 하지만 무덤덤한 이 노배우는 수상 이후 자신의 삶에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장담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똑같은 친구하고 놀고 같은 집에 살고 있어요. 내가 감사한 것은 그런 거예요. 나이, 내 나이에 감사해보긴 정말 처음이야. 나도 늙는 게 싫은데 아카데미인지 ‘오카데미’인지를 30~40대에 탔으면 붕붕 떴을 거예요. 상을 받는 순간에는 기쁘죠. 하지만 그 상이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아요. 나는 나로 살다가 죽는 거예요.”

인터뷰 당시 윤여정은 애플TV+ 새 드라마 시리즈 <파친코>의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몇 주 앞으로 다가온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LA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전날 영화 <미나리>에서 자신의 사위를 연기했던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을 만났다며 스티븐 연에게 “너는 아카데미상을 안 타길 잘했다”고 얘기해줬다 했다.

“‘(아카데미를) 안 타길 잘했어, 지금 탔으면 너는 네가 아니야’ 그랬어요. 나도 젊은 시절에 그 상을 받았다면 나일 수 없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그게 다 운이거든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크했고, 그러고 나서 이듬해에 팬데믹 덕에 <미나리>가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간 거였죠.”

<파친코>의 선자,
우리 엄마 시절의 여자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는 여느 할머니와 달리 요리도 못하고, 집안일보다는 레슬링 경기 관전을 즐기는 특이한 캐릭터였지만, 딸과 손주들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감성을 전달했다. <파친코>에서 그는 또 한 번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여성 ‘선자’를 연기했다.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1990년대까지 굴곡진 삶을 살아낸 한 이민자 여성과 후손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자이니치’(재일, 在日)라는 표현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거래요.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산다는 걸 의미한다고 하네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전쟁으로 인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에요.”

사실 윤여정도 <파친코>의 여주인공 선자처럼 이민자로 살았던 과거가 있다. 선자는 일본에서, 윤여정은 미국에서 자녀를 낳고 길렀다. 직접 맞닿은 부분은 없었지만, 선자라는 캐릭터에는 공감할 부분이 없지 않았다. 윤여정에게도 선자처럼 홀로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열심히 일에 매진해야 했던 과거가 있다.

“사실 선자는 나하고는 상황이 너무 달랐어요. 나는 미국에서 일은 안 했거든요. 이혼 후에 살려고 (한국에서) 일을 많이 했죠. 그런 생각은 했어요. 살려고 일을 할 때는 이 일이 힘든 일인지 아닌지 잘 몰라요. 힘든 줄도 모르고 하죠. 나도 그랬어요. 선자도 김치를 만들어 팔 때 그게 힘든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 해요.”

연기엔 ‘마스터’가 없어,
그냥 늙은 배우일 뿐

<파친코>의 젊은 배우들은 윤여정을 (연기) ‘마스터’라고 표현했다. 사실 세계 최고 시상식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윤여정에게 마스터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이 찬사에 그는 정색하며 ‘연기는 마스터할 수 없다, 나는 늙은 배우일 뿐’이라고 말해 웃음을 줬다. 이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 발휘되는 촌철살인 유머 감각은 많은 이가 윤여정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는 힘들게 살고 힘겹게 촬영해서 젊은 배우들처럼 진지하지 않아요. 물론 어떤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진지하지만 촬영 때가 아닌 다른 순간에도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건 바보 같아요. 웃고 싶고 릴렉스하고 싶지. 어떤 배우들은 쉬는 시간에 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연기는 토론이 아니에요. 난 그런 걸 싫어해요.”

<미나리>에 이어 <파친코>까지. 윤여정은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고 있다. 어쩌면 이민자로서 10여 년을 살아온 경험을 가졌기에 작품들이 가진 메시지에 공감해 출연을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 윤여정은 “<미나리>와 <파친코> 등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재미교포인 아들들을 떠올리며 두 작품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사실 내가 미국에 살 때는 인종차별주의를 하나도 못 느꼈어요. 나는 직장도 안 가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만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들들이 그런 걸 많이 느꼈나 봐요. 애들을 보면서 ‘얘네는 국제 고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한국에 와도 한국말을 못해서 이상하고, 미국에서도 외모가 다르니까 미국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이런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는 건 아마 내 마음에 그런 게 있어서 그런가 봐요. 우리 아들들과 같은 사람들이 뭔가를 만든다고 하니 마음이 가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