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길 줄 아는 남자
이서진
한동안 예능인으로 살아온 이서진이 이번에는 코미디에 도전했다. 그간 본업에서 주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그는 티빙 드라마 <내과 박원장>에서 팍팍한 현실 속에서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서민적인 개업의로 변신해 공감 넘치는 웃음을 선사했다.
글 정유진 사진 티빙
<내과 박원장>은 초짜 개원의의 ‘웃픈’ 현실을 그린 메디컬 코미디 드라마로, 동명의 네이버 웹툰이 원작이다. 처음 이서진이 주인공 박 원장 역할을 맡았을 때 많은 이를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의 대머리 시도였다. 웹툰 속 주인공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었고, 드라마 역시 같은 설정을 유지했다. 다만, ‘가발을 착용했다’는 설정이 더해져 매회 민머리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벗었을 뿐이다.
“나영석 PD가 촬영장에 왔었어요. 그때 제가 ‘민머리’ 분장을 한 모습을 보고 뒤집어지다시피 했죠. 민머리 분장을 하기 전 시뮬레이션으로 사진을 만들어둔 게 있었어요. 방송은 그 사진보다 잘 나온 것 같아요. 그 사진은 처음 봤을 때 너무 충격이었거든요. 그 정도라면 웃기기는 하겠지만 좀 슬플 것 같았어요.”
그간 멜로드라마에서 멋진 남자주인공을 도맡아 했던 이서진이 왜 갑자기 이런 파격 변신에 나선 것일까. 신상에 변화라도 생긴 게 아니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 이서진은 “배우로서 특수분장을 한다는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니다. 많은 분께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생각이 있다”고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제게 코미디 대본이 온 것이 신선했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모니터했을 때도 대본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제 감성보다는 젊은 감성에 의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했어요.”
‘젊은 친구들’의 감성을 믿고 작품을 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내과 박원장>을 통해 이서진은 연기적 스펙트럼을 한 차원 더 넓혔다는 평을 들었으며 젊은 시청자들에게도 ‘신선하고 재밌는 배우’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이제 ‘이산’은 후배 이준호의 것!
데뷔한 이래 이서진의 이름 앞에는 꼭 ‘엄친아’나 ‘젠틀맨’ 같은 수식어들이 붙고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모>(2003), <불새>(2004), <연인>(2006), <이산>(2007) 등 대표작 속 그의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멜로드라마 남자주인공의 정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박 원장과 같은 캐릭터와 ‘왕자님’ 캐릭터들을 비교할 때 어느 편이 연기하는 것이 쉬우냐는 질문에 이서진은 “드라마상의 멋진 캐릭터는 현실에 없는 멋진 사람들 이어서 어렵다”고 답했다. 오히려 박 원장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했다고.
“박 원장은 월세, 생활비, 병원 유지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죠. 저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아낄까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박 원장 못지않게 아끼는 버릇이 있죠. 물론 박 원장처럼 빚이 늘어나는 상황은 아니지만, 저 역시 늘 유지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요. 그런 점에서 이해가 참 잘 가는 캐릭터였어요.”
이서진의 대표작은 사극 <이산>이다. 그가 주인공 이산을 연기한 <이산>은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산> 역시 <옷소매 붉은 끝동>처럼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이산)와 성덕임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사극이기 때문이다. 이서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산>의 인기를 언급하자 “이제 이산은 이준호다. 내가 이산을 했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난다”며 캐릭터의 세대교체를 ‘쿨’하게 인정했다.
“준호가 이산 역할로 잘돼서 너무 기쁘고 뿌듯해요. 저는 준호가 잘될 줄 알았어요. 이제 이산은 준호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이산> 역주행이요? 그건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네요.”
난 무조건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
코미디를 위해 망가지는, 의외의 도전을 선택한 배우 이서진에게 ‘다음 도전’에 대한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서진은 “앞으로도 코미디가 들어온다면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분장 빼고는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절한 현실에 처한 남자를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임했기에 ‘코미디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도 코미디가 들어온다면 할 생각이 있어요. 보시는 분들이 재미있어하는 것을 해야죠.”
사실 이서진은 드라마 히트작만큼이나 예능 히트작도 많다. 나영석 PD와 함께한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 <윤식당>, <윤스테이> 등이 대표적이다. 예능에 코미디까지, 이미지가 중요한 배우에게 이처럼 ‘왁자지껄한’ 필모그래피가 부담을 주지는 않을까.
“예능 이미지가 굳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예능은 예능이고 연기는 연기죠. 전 기본적으로 진지한 걸 싫어해요. 재밌어야 해요. 무조건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거든요. 연기할 때는 재미와 감동을 전해야 하지만 실제 삶에서 감동은 필요 없어요. 재미만 추구합니다.”
1999년 배우로 데뷔한 이서진은 벌써 20년 넘는 경력을 자랑하는 ‘중견 배우’의 위치에 올라섰다. 다작하지는 않았지만, 알찬 작품들로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시간이 정말 금세 지나간 것 같아요. 저는 일을 많이 한 스타일은 아니어서 민망하다는 생각도 하는데, 젊은 배우들을 만나면 ‘일 좀 줄이고 즐기는 삶도 충분히 누리면 좋겠다’고 얘기해줍니다. 나이 들어 즐기는 것과 젊었을 때 즐기는 것은 또 다르니까요. 충분히 즐기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