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백제의 혼이 담긴 부여
백제 역사길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는 백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부여라는 명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 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다. 완성된 백제 문화와 백제 패망의 아픔도 모두 담고 있는 부여에서 백제의 역사를 느껴본다.
글 편집실 참고 자료&사진 부여군
궁남지
찬란한 백제의 혼이 담긴 부여
백제 역사길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는 백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부여라는 명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 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다. 완성된 백제 문화와 백제 패망의 아픔도 모두 담고 있는 부여에서 백제의 역사를 느껴본다.
글 편집실 참고 자료&사진 부여군
아름다움을 간직한 궁의 정원
궁남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궁남지는 백제 말기인 634년에 궁궐 남쪽 별궁 주변에 조성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정원이다. 궁남지의 총 면적은 38만 5918㎡, 연지 면적은 12만 8610㎡에 이른다. 7~8월이면 수많은 연꽃이 궁남지와 주변 연지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궁남지를 끼고 도보 여행길 2개가 조성돼 있는데 사비길과 백마강길이다. 거리가 각각 13.4km, 24km에 이른다.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왓조각, 그릇 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림사지
백제의 대표적 절터
정림사지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 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를 세웠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5.62m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는 부여 중심부에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즉,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승방과 회랑으로 둘러싼 형태이다. 정림사의 존속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백제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본다. 그 까닭은 정림사지 발굴 조사에서 금당터의 붉게 탄 흙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림사는 사비 도성의 중심부에 있어 당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문화가 백제 불교문화로 완성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림사지는 강당을 갖춘 백제식 1탑 1금당 양식으로, 이는 백제 사찰의 특징이며 강당을 배치하는 전통은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 고유의 석탑인 정림사지5층 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석탑을 비롯한 백제의 석탑 건축 기술은 이후 신라에 이어져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교두보를 제공했다.
반월루
백제의 문화적 역량이 집약된 곳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둘레는 2,200m이고, 지정 면적은 98만 3,900㎡이다. 부여 시가지의 북편에 자리한다. 시가지를 휘감아 도는 백마강을 굽어보는 위치에 표고 106m인 부소산이 솟아 있다. 이 산의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부소산성이 위치하고, 그 남쪽 기슭엔 사비시대의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부소산성은 보조 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고,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 사비루(泗沘樓)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밖에 고란사(高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돼 있으며, 대한민국 사적 제5호다. 부소산성의 고란사는 불로장생초로 알려진 '고란초'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백제 임금이 마실 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는 고란사 약수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대형 건물지 등 왕궁의 주요 시설들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어 백제의 왕성 구조를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남조 양나라와 잦은 교류로 선진적인 문화가 유입되면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문화적 역량이 한껏 고조되었다. 백제가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며 발전시킨 문화적 역량은 사비도성 축조 과정에서 발휘되었다. 이와 관련된 유적이 바로 왕궁지인 관북리 유적인데,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쓰였고, 전란 시에는 마지막 방어 거점 역할을 했던 중요한 유적이다.
낙화암
백제를 지키려 꽃처럼 떨어진 곳
낙화암
해발 106m인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있는 부여의 진산이다. 평지에 돌출한 형태이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았다. 부소산이라는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였는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라는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소산에는 군창지,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고란사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널리 알려졌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낙화암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구드래 선착장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고란사 선착장을 이용하거나 부소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낙화암으로 걸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