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만남

이선균은 흐른다

어느덧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배우 이선균에게서는 ‘아저씨’나 ‘꼰대’ 같은 느낌을 찾을 수 없다. 꾸밈없는 태도와 말투, 연기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살아온 그는 여전히 젊고 뜨거우며, 어디로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정유진 사진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의사, 변호사, 뇌과학자 뛰어넘은
‘똑똑한’ 캐릭터?

이선균은 종종 ‘엘리트 전문 배우’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는다. 벤처기업 사장(‘기생충’)에 의사(‘하얀 거탑’), 변호사(‘성난 변호사’), 뇌과학자(‘Dr.브레인’)까지 다채로운 영화와 드라마에서 엘리트 직업군에 속한 인물들을 연기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영화 <킹메이커>(감독 변성현)에서 또 한 번 엘리트 캐릭터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 참모다. <킹메이커>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참모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엄창록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렸던 정치 전략가다. 이선균은 “지금까지 해온 역할 중 가장 똑똑한 역할 아니냐?”는 질문에 “가장 똑똑한 역할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극 중 ‘저처럼 똑똑하면 죄입니까?’라고 하는 대사가 나와서 그렇게 얘기해주시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처럼 ‘스마트’한 캐릭터가 돋보인 <킹메이커>는 존경하는 선배 설경구와 함께한 작품이라 더 의미가 있었다.

“저는 롤 모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마음에서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게 (설)경구 선배님이었어요. 이번에 같이 영화를 하며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다시 한번 느끼게 돼 감사했고, 그분과 ‘투샷’이 잡혀서 영광이었어요.”

영화 속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김운범과 이선균이 연기한 서창대의 성격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김운범이 소신과 신념을 지키는 쪽이라면, 서창대는 갖은 모략과 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손에 쥐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실제 서창대와 비슷한 모습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선균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게 없다”고 대답했다. 실제 모습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 모양이었다.

“저는 ‘아니면 말고’ 식이 많아요. 그래서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모략을 하는 행위는 저와 잘 안 맞아요. 전 불편하고 너무 치열하면 빠지거나 튕겨 나가는 편이에요.”

<기생충> 단체 채팅방은 아직도 활발

<킹메이커>는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연출한 변성현 감독과 제작진, 설경구가 다시 뭉쳐 만든 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다. 표면적으로는 <불한당> 팀에 낯선 이선균이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이선균도 <불한당>과 남모를 인연이 있다. 아내인 배우 전혜진이 <불한당>에서 천 팀장 역할로 출연했던 것.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을 하는데, 전혜진 씨가 ‘빨리 피드백을 해줘라’라고 얘기를 했었어요.(웃음) <불한당>은 팬덤이 강하잖아요. 아내가 출연했을 때 그런 큰 팬덤을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불한당> 제작진과 함께하려고 보니 제가 굴러온 돌처럼 거기에 들어가도 될까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팀워크가 좋았고, 제가 그 속에 흡수되면 잘되겠구나 싶었어요.”

전혜진에게 <불한당>이 있다면 이선균에게는 <기생충>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이선균은 박 사장 역할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까지 4개 상을 탄 <기생충> 팀은 <불한당> 못지않은 팀워크를 발휘했다. 재밌는 사실은 <기생충>에서 함께했던 박소담과 정현준이 출연한 <특송>, 최우식과 박명훈의 영화 <경관의 피>가 <킹메이커>와 비슷한 겨울시즌에 개봉했다는 점이다.

나이 먹어도 현장에 필요한 배우 되고파

<킹메이커>는 이선균에게 또 다른 변신이었다. 외적인 변화부터 캐릭터 구축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정보가 많지 않은 인물이라 상상의 영역이 컸고, 감독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인물을 만들어갔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인물이라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부담은 덜했던 것 같아요. 대신 앞에서 영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또 20대부터 60대까지 표현해야 하는 부분에서도 부담을 많이 느꼈죠.”

극 중 이선균은 다채로운 슈트 스타일링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영화 촬영 초반에는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다고. 아쉽고 후회되는 일들도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이선균은 언제나 가식이 없고 솔직하다. 스스로에 대한 이처럼 정직한 태도가 시간이 갈수록 ‘배우 이선균’의 가치를 높여주는 힘이 되고 있다. 자신의 것을 고집하기보다 영화 전체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언제나 ‘현장에 필요한 배우가 되자’는 마음가짐으로 연기를 한다고 했다. 현장은 늘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그 때문에 고민이 늘어나지만 결국 그로 인해 배우는 성장한다.

“자기 연기에 확신하고 고민 없이 그게 맞는 거라고 정답을 내려버리면 자만해지고 고여 있게 되죠. 일하면서 계속 고민하게 되는데 그 고민을 통해 제가 조금씩 채워져가는 걸 느껴요. 나이를 먹어도 현장에 어우러지고, 거기에 맞춰 변해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언제까지 배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현장에 있고 싶어요.”